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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우울하고 심란한 저녁입니다.
내가 너무도 무가치하고 쓸모없어지는 기분이지요.
이런 기분이라면 아무리 맛난 개껌조차 삼킬 수가 없을 것 같답니다.

물론 제 실수로 갓 세탁한 보송보송했던 이불이 더럽혀지고, 또다시 세탁하는 수고로움을 겪게 한 점은 깊이 사과드립니다. 할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 더럽혀진 이불을 대신 세탁해드리고 싶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저는 어쩔 수 없는 작은 강아지입니다. 작은 요크셔테리어는 혼자서 저 높디높은 세탁기에 세제와 이불을 넣고 전원버튼을 누를 수 없습니다. 세탁기의 메뉴얼조차 본적이 없고, 어쩌다 세탁기가 고장나도 세탁기 측면에 커다랗게 쓰여진 AS전화번호로 연락하는 것조차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무능하다 욕하신다해도 달라질건 없답니다.

하지만 저도 나름의 항변이 없진 않습니다.
세탁기도, 세제도, 전화도 그모든 것들이 당신들의 잣대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제가 오늘 이불에 저지른 실수 또한 따지고 보면 저에게 전혀 적합하지 않은 당신들만의 배변문화를 무리하게 적용하는데서 발생한 불행한 사고입니다.
혹시라도 지금껏 저에게 아무런 동의도 없이 당신들만의 시스템을 무리하게 강요하고 있는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이 한번이라도 있으신가요? 적어도 이 집안에서 5kg짜리 네발달린 포유동물을 위한 것이 과연 존재하고 있는 걸까요?
불행히도 당신들은 작은 요크셔테리어의 관점에 입각해 사고할만한 능력이 있어보이진 않습니다.
물론 이것을 두고 벌써 한식구로 살아온지 8년이 지난 가족인 당신들만을 탓할 의도는 없습니다. 당신들도 그저 보편적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는 힘없는 개인일 뿐이니까요. 비단 당신들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필립스탁(Philippe Starck)조차 개의 감성을 위해 디자인하진 않으니까요.

어쩌면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아닐까합니다.
이러한 불평등한 가치의 기준이 날로 심화되어 급기야 그 기준의 주도권을 쥔쪽에선 이것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양보하는 쪽을 오히려 무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정의내리는 것이지요. 저의 경우만이 국한시켜 볼일이 아니라 지금도 사회곳곳에선 주도권을 가진 다수의 폭력이 스스럼 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왼손잡이가 쓸 수 없는 가위가 버젓이 팔리고, 휠체어가 오를 수 없는 계단이 있고, B컵이상의 여성이 착용하기 불편한 방탄조끼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조짐입니다. 소수를 생각하지 않고, 비주류의 의견을 묵살하는 순간부터 사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 더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사회의 모순을 들추자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당신들에게 양보를 아끼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저는 단지 당신들이 저의 태생적 한계를 정확히 인정하고 행여라도 그로 인한 실수가 발생하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는 소박한 바람뿐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말 드리기가 참 뭣하지만, 저는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서로 다른 종으로써 이 집안에서 꽤 훌륭하게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아나콘다나 악어라면 어땠을까요? 그들은 가족의 발가락을 물어뜯는 야만족들입니다.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그들이 저지를 실수를 생각해보면 이부자리에 용변을 묻히는 사고 정도에 오늘처럼 당신들이 호들갑떨며 저를 질타하실 수 있을까요.
어쩌다 가끔 세탁기를 돌리고, 개껌과 사료를 사 나르는 것 정도는 이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 가운데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두 개체가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극히 당연한 노력에 불과할 것입니다.

부디 날이 다시 밝아 내일이 온다해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는 당신들이 아무렇지 않게 할수 있는 용변뒤 두루마리 휴지를 술술 풀어 깨끗히 뒤처리를 하는 일조차 버거운 이들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요.
이불사고는 다시한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저녁입니다..

- 요크셔테리어 찡아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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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느 요크셔테리어의 소견
분류: 잡담
이름: monodays


등록일: 2007-06-23 23:46
조회수: 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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