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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정원 위의 여자>


어느해, 3월의 마지막 밤 꿈을 꾸었다.


남자는 한 여자와 여행을 떠난다.
여자는 평범해서 애틋하다.
둘은 어느새 낡은 버스의 뒷자리다.
버스는 좁은 길을 따라 산동네를 오른다. 길은 참 서글프게도 굽어있다.

힘에 겹게 산동네 비탈길을 오르는 버스.
옆자리의 여자는 이 소박한 여행길이 그리도 설레는지 천진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른다.
버스 차창은 어느 순간 산산조각 날 듯 요동치다가 이내 잠잠해지고 또 이내 요동치다가 잠잠해진다.
차창너머 보이는 산동네의 담장처럼, 옥상마다 올라선 물탱크처럼, 남자는 각양각색의 상념들과 추억들로 빼곡하다. 그래서 저 풍경이 낯설지가 않았었나보다.

어느 순간, 요동치던 것은 버스의 차창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인 듯하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미소짓고 있다.



*     *     *




여자와 남자는 넓고 푸른 잔디가 있는 호텔에 도착한다.
푸른 잔디 정원은 화려한 중앙정원보다 잊혀진 뒤뜰 같다.
어느새 남자는 3,4층쯤 되는 방에 들어서 있다.
방에는 푸른 잔디 정원을 향해 채광 좋은 커다란 창이 나있다.
바깥은 아직 밝지만 한낮의 열기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여자는 남자 곁에 있지 않다.

그녀는 홀로 잔디 정원 위를 거닐고 있다.
그 걸음은 목적을 잃은 듯하다.
그저 뒷짐을 진채로 잔디 위를 서성이고 있다.

우유빛깔 스커트는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주름지며 햇살을 되받아낸다. 하얀 손목은 얌전히 뒷짐 지어있고, 아무렇게나 묶은 머릿결은 이따금씩 그녀의 얼굴에 쏟아져 내려서 그녀는 바닷가 모래를 움키듯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기곤 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는 눈이 시고 마음이 시리다.

그녀는 어쩐지
눈물이 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한순간 그녀는 창안에서 내려다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빙긋이 웃음 짓는다.
그리고는 다시 잔디 위를 서성이며 조금씩 남자의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



*     *     *




창 너머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의 마음이 그리도 저미었던 것은.
그녀가 꿈이 깨면 사라질 사람임을 예감해서일까.

그 푸르른 잔디정원, 빛나던 스커트, 뒷짐진 하얀 손, 흐드러진 머릿결, 발끝을 바라보며 서성이던 모습, 남자의 저린 마음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해가 바뀐 지금가지도 눈을 뜬 뒤 겪었던 내 모든 현실보다 생생하게 남아있지만.

그녀의 얼굴만은 떠오르지 않는다.

못난 나는 그녀가 내 지난날 떠나보낸 연인이었는지, 아직 만나지 못한 인연인지조차 알 길이 없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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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잔디정원 위의 여자
분류: 잡담
이름: monodays


등록일: 2007-04-22 01:07
조회수: 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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