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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여섯 여자와 나>

꽤 늦은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지하철 객차 내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붐볐으나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나만의 생각이겠으나 내리는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마 뒤 내가 타고 있던 객차 내에는 딱 여섯명의 여자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도 건너편 자리에 여섯명의 여자들이 나란히 앉아있고 이쪽 편엔 나 혼자만이 덜렁 그녀들을 마주보고 있는 꼴이 되었다.
나는 지하철을 꽤 많이 타보았다고 자부하고 있으나 이런 특이한 경험은 단연코 처음이다.
여섯명의 여자와 나는 나란히 마주보고서 조심스럽게 서로를 관찰하며 지하철을 타고 한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 특이한 광경에는 분명 초현실적인 면이 존재하고 있었다. 만일 이 기괴한 장면을 르네 마그리트나 마이너 화이트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붓을 들거나 셔터를 눌렀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이 특별한 체험을 기록하고자 여섯명의 여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 한다.


*     *     *



첫 번째 여자.
여섯명의 여자 중 단연코 미인인데다 늘씬하기까지 하다.
내 타입은 아니지만 한눈에 미인이란 느낌이 들 정도이다. 비록 앉아 있는 상태였으나 쭉 뻗은 다리만 보아도 몸매 또한 보통이상임이 확실했다. 심하게 꾸미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고유한 매력을 풍겨낼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 불가사의하고 특이한 상황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미련둥이 같으니...



두 번째 여자.
외견상 가장 어려 보였다.
개론서 같은 실속없어 보이는 교재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학생같았다. 옷차림은 수수하고 평범하다 못해 심심할 지경이었다. 얼굴은 유난히 하얗고 피부가 깨끗했다. 뛰어난 미인까지는 아니지만 도회적인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서 나름대로 스타일만 연출한다면 남학생들에게 꽤 인기를 얻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 두터운 개론서를 다 공부하고 나면 매력있는 숙녀가 될 수 있을 거라 격려해 주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대게 의미없는 수다겠지만...



세번째 여자.
하얀색의 아디다스 스포츠백을 끌어안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외모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내 앞에 있는 12개의 다리 중 단연 굵은 종아리를 가졌다. 운동이 시급한 몸매였다.
외모로 사람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여섯명 중 가장 떨어지는 외모였다. 첫 번째 여자와는 상대적 극점에 서있는 셈이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네 번째 여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복장은 초록색 상하의의 무척이나 튀는 옷을 입고 있었다. 외모는 극히 평범한 편이었으나 너무도 과격한 의상이었다. 마치 초록별 외계생물 같아 보였다.



다섯 번째 여자.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슴이 깊게 파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30대 중후반 정도의 유부녀같아 보였으나 아직 나름대로 섹시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거대하고 노란 싸구려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면 검은 정장을 입은 로버트 드니로와 알파치노가 키티가방을 들고, 덴젤 워싱턴이 바니걸스 복장을 하고 있는 꼴을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잘 차려입고 그런 가방을 들고 나올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여섯 번째 여자.
전혀 특징이 없는 중년 여자였다. 옅은 핑크색 남방을 입었다는 것 외에 전혀 특이한 점이 없었다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만일 하루만 더 지난다면 나는 그 자리에 여섯명이 아니라 다섯명이 있었다고 기억할지 모를 일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 나온 그르누이처럼 무색무취의 여성이다.



이상의 여섯 여자와 나는 지하철을 타고서 한참을 한참을 흘러갔다.
어쩌면 지하철은 마그리트의 그림 한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     *


PS) 한편, 당시 여자들의 관점




첫 번째 여자.
앞자리에 허멀건 놈이 꼴에 보이는 건 있는지 아까부터 나를 힐끔거린다.
재수없는 타입이다. 모르는 척해야겠다.


두 번째 여자.
앞에 이상한 아저씨가 자꾸 쳐다본다. 위험해 보이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 엄마한테 마중 나오라고 문자 보내야겠다.


세 번째 여자.
아.. 배고프다...


네 번째 여자.
앞자리에 남자가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저남자는 내가 외계생물이란 사실을 알면 얼마나 당혹스러워 할까.


다섯 번째 여자.
언제나 시어머니는 김치를 꼭 괴상한 가방에 넣어서 챙겨주신다. 지난번엔 아기공룡 둘리가 그려진 초록색 가방이었다. 오늘은 노란 가방에 피구왕 통키가 불꽃슛을 쏘고 있다. 쪽팔려 죽을 지경이다. 앞자리 남자는 못본척 좀 해주면 좋으련만 계속 가방을 쳐다본다.


여섯 번째 여자.
앞자리 남자가 계속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요즘은 어딜가나 변태같은 놈들이 넘친다.





우리는 이상한 남자와 지하철을 타고서 한참을 한참을 흘러간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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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하철의 여섯 여자와 나
분류: 잡담
이름: monodays


등록일: 2007-05-06 01:05
조회수: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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